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더글러스 맥아더/평가 (문단 편집) ==== [[38선]] 돌파 ==== 1950년 9월 27일, 맥아더는 국가안정보장 회의에 "38선 돌파로 소련이나 중국 공산주의 세력이 개입할 위험성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각서를 발송했다. 이에 조지 마셜 국방장관은 맥아더에게 "우리는 38선 이북으로 진군하기 위해 전술적 또는 전략적으로 방해받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이후 유엔군은 10월 1일 38선을 돌파하기로 결정하고 대대적인 공세를 개시했다. 10월 2일, 한국군은 원산을 기습 폭격 후 상륙해 10월 9일 점령하였고 서부전선에서도 동부전선에서 공세가 개시된 뒤 10일 후에 북진을 개시했다. UN군과 한국군은 파죽지세로 북진하여 10월 19일 평양을 공략하고 11월 말에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에 이르렀다. 이미 중화인민공화국의 저우언라이 외교부장은 국군의 북진은 상관없으나 유엔군이 38선을 넘어선다면 대대적으로 개입할 거라고 공개적으로 선언한 상태였다.[* 그러나 실제로 유엔군 없이 국군만의 단독북진이 가능했을 것인지, 그리고 설사 국군만 단독 북진했다 하더라도 중공군이 개입하지 않았을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린다.] 그리고 유엔군이 중국과의 국경선인 압록강-두만강에 근접해오자 더이상 북진한다면 무조건 개입하겠다고 다시금 위협을 가했다. 그러나 맥아더는 중공군이 감히 유엔군을 상대로 뛰어들 가능성은 거의 없으며 설령 온다고 해도 압도적인 공군과 포병을 앞세워 "역사상 가장 큰 도살"을 벌일 거라고 장담했다. 또한 그는 제8군이 연말까지 작전을 완수하고 일본으로 철수할 수 있으며 이듬해 1월엔 유럽으로 일부 병력을 파견할 수 있을 거라고 주장했다. 이후 그는 최전선을 시찰했지만 중공군이 북한에 들어왔다는 걸 확인하지 못하고 크리스마스 전까지 압록강 일대를 평정하라고 명령했다. 이러한 그의 중공군 경시는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고 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